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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 번역자 : Blanka LaSorcistino, Muroju | All These Lives are Fit to Ruin |
이곳은 병원이었다. 적어도 그것만은 분명했다.
파리엔은 푹신한 침대에 누운 채로 의식이 들락날락했다. 가끔 사람들이 들어와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고, 침대 옆에 놓인 기계를 확인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새하얬다. 기계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건 어쩌면 자신의 시야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사방에는 튜브가 있었고, 그의 몸 여기저기에는 고사머(gossamer) 튜브 가닥이 붙어 있었는데, 마치 늘어진 꼭두각시 인형같았다.
속삭이는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사고”는 그중 하나였다. “전함”은 또 다른 단어였다. 그리고 “캡슐리어”. 속삭이는 사람들조차도 스스로가 지나치게 큰 소리를 낸다고 생각했는지, 순수한 침묵 속에서만 그 단어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려 애쓰는 것 같았다.
파리엔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눈 앞엔 한 남자가 우뚝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름은 실랏 엔포어다.” 남자는 대단한 소식이자 파리엔이 이미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인 것 마냥 말했다. “자네는 내게 답을 주게 될 거야, 승무원.”
파리엔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말라붙어 나오지 않았다. 작은 쉬익 소리가 들리더니 목구멍의 메마른 안쪽이 갑자기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재수화 장치다.” 실랏이 말했다. “그건 자네의 필요 사항을 모니터링하고 자네의 몸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따라 화학 물질을 주입하는데, 경험해본 적이 없거나 연약한 피부에 처음 닿을 때 다치지 않게 하려는 거다. 파리엔, 자넨 끔찍한 경험을 했어. 많은 이들이 자네가 겪은 참사에서 살아남지 못했지.”
실랏이 몸을 숙이며 어두운 어조로 말했다. “나도 확실히 죽었었고.”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함장님?” 파리엔은 재수화 장치에도 불구하고 거친 목을 간신히 짜내었다.
캡슐리어는 작은 데이터 패드를 꺼내 한참 동안 화면을 살피며 파리엔을 무시했다. 마침내, 하지만 여전히 파리엔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그가 물었다. “나를 아나, 승무원?”
“아뇨, 함장님.” 파리엔이 답했다. “하지만 성함은 압니다.”
캡슐리어는 그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이름이 자네에게 무슨 의미인가?”
파리엔은 말했다. “당신은 '아크 오브 디파이언스'의 함장이시고…아니, 함장이셨죠.” 목이 따끔거렸다. “그 전함급 함선. 제가 복무했던 함선 말입니다. 함장님.”
“그렇다면…나는 어떤 사람이겠나?”
“캡슐리어이십니다.” 파리엔은 함장을 생전 처음 보았다. 사실 다른 캡슐리어를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저 남자가 한 번쯤 뒤로 돌아서서, 소문대로 남자의 목에 박혀 있을 신경 소켓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이상하고, 어리석고, 부질없는 기대지만, 그렇기에 지금 상황에선 전적으로 어울린다고 느꼈다.
“아크의 마지막 임무가 뭐였지?”
“저희를 데드 스페이스로 데려가셨죠. 당신이 폐허로 통하는 또다른 고대 관문을 찾았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폐허.”
“지금은 구리스타가 점령하고 있는 폐허 말입니다, 함장님.” 파리엔이 말했다. “함장님의 목적은 아마 그들의 귀중한 물건들을 털어가는 것이었겠죠.”
“내 생각을 자네가 감히 안다고 생각하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함장님.” 파리엔은 이렇게 말하며 즉시 후회했다. 그 말은 모욕적이었고, 그나마 그의 간청하는 어조의 기운 없는 목소리 덕에 캡슐리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캡슐리어는 한 걸음 더 다가가 살짝 몸을 기울이며, 덜떨어진 학생을 바라보듯 파리엔을 내려보았다. “자네가 여기 왜 있는지 알고 있나?”
“아크가 폭발했고, 저희는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그래, 그런 일이 있긴 있었지.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자네가 지금 이 시각, 이 장소에 있는 건 아니잖나.”
“…함장님?”
캡슐리어는 완벽하게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자네의 치료비를 지불하기로 한 것은 내가 물어보고 싶은 몇 가지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얻은 정보가 만족스럽다면 자네는 곧 이곳에서 풀려나 가족, 친구, 생존한 동료 승무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건-” 그는 재수화 장치를 가리켰다. 장치엔 무수히 많은, 파리엔이 생각하기도 싫은 곳에 여기저기 꽂힌 튜브가 연결되어 있었다. “이건 자네 몸에 다른 것을 주입할 것이고, 자네는 촛불처럼 꺼지게 될 거야.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테고.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을 거야. 내가 이 장비를 유지하기 위해 쏟아 붓는 돈은 단지 조금 다른 용도로 쓰일 뿐이겠지. 자네는 누군가의 2시간짜리 야근 서류 처리 대상이 되었다가 결국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질 거다. 날 실망시키지 말게, 승무원.”
파리엔은 침을 삼켰다. 목은 여전히 따끔거렸지만, 그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 느낌이 반가울 뿐이었다.
“제게 원하는 게 뭡니까, 함장님?” 그가 말했다.
“나는 구리스타 함대를 박살내던 중이었고, 놈들의 식민지 기지도 이미 조준하고 있었는데… 함포가 재장전되지 않더군. 전부 다 말이야.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 드론들이 마치 자유 의지라도 가진 것 마냥 적함에 뛰어들며 짧은 자살 발레 쇼를 펼치듯 흩어졌지. 나는 파리같은 구리스타 놈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놈들의 독침이 내 목숨을 빨아먹는 동안 가만히 앉아 꼼짝도 못하고 있었어.”
실랏은 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파리엔, 한 가지가 잘못되면 곧 모든 일이 틀어지고 말아. 난 거기서 그걸 깨달았어. 내 함포가 재장전이 안 돼. 그래, 다음은 뭐가 잘못될까? 드론이겠지!” 그는 양 손을 치켜들며 수염 없는 얼굴에 놀란 흉내를 내었다. “이런, 대체 무슨 일이지? 괜찮아. 이젠 다 잘 될거야. 아니, 잠깐만! 이번엔 또 뭐야?” 실랏은 손을 내리고 파리엔을 노려보았다. “다음에 뭐가 잘못됐는지 맞춰보겠나, 승무원?”
파리엔은 눈을 감으며 시원하고 부드러운 베개에 머리를 기대었다. 베개가 그를 푹 감싸는 듯 했다. “탈출 포드.”
“그래, 탈출 포드.” 실랏은 함께 깨달음을 얻은 듯 그의 말을 따라했다. “내 캡슐은 박살나지 않았어, 파리엔. 그 순간엔 말야. 두 성계쯤 너머에서 내게 원한을 품은 몇몇 이들이 대신 처리했지. 하지만 그 함선에 있던 사람들, 자네와 함께 일했던 6천 명의 사람들이 몸을 맡긴 그 탈출 포드들은 그렇게 오래 가지도 못했어, 파리엔. 그들이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알고 있나, 파리엔?”
파리엔은 여전히 베개에 누운 채로, 천장을 응시하며 침묵했다. 희미한 시야 한 구석에서 실랏이 손을 들어 데이터 패드에 무언가를 누르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갑자기 그의 목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장과 창자, 정맥과 팔다리, 얼굴까지 마치 몸 속에 액체 수은을 부은 것만 같았다. 그는 기침하며 몸부림쳤고, 고통을 떨쳐내기 위해 숨을 헐떡거렸다. 그는 몸 곳곳에 단단히 붙들린 튜브를 떼어내려고 애썼지만, 그에겐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고통으로 눈 앞이 흐려지는 가운데 실랏의 목소리가 들렸다. “ 승무원,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든 내 안내를 따라가면 편하게 통과할 수 있을 거다. 질문에 대답해.”
화끈거림이 조금 가라앉았다. 파리엔은 힘겹게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많은 포드가 바로 파괴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폭발할 때 함선에서 튕겨져 나갔지만, 평소처럼 레이더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대부분 분해되어버렸다는 겁니다. 하지만 함선 외곽, 그러니까 비 전투 구역의 승무원들과 그 가족들이 있던 포드들은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파괴된 건 모두 핵심에 있던 포드, 즉 함선이 파괴되기 몇 초 전에야 겨우 발사되는 포드들이었습니다.”
“네가 근무하던 곳 말이지.” 실랏이 말했다.
“제가 근무하던 곳이었죠.”
“네 포드는 살아남았어.” 실랏이 덧붙였다. “다른 몇몇 포드들도 살아남았지. 하지만 그 날 함선의 핵심부에서 일하던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파리엔은 여전히 불타는 독극물이 천천히 혈관에서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그가 왜 승무원들의 운명에 대해 궁금해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다음 질문이다. 정직하게 답하는 게 좋을 거야.” 실랏이 말을 이었다. “이 사태를 초래한 게 자네 짓이라는 걸 인정하나?”
“저… 전…” 파리엔이 말을 시작했다. 그는 침묵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전에 하나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함장님? 그래야 제대로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보게.”
“도대체 무슨 근거로 제가 그런 끔찍한, 참혹한 짓을 벌였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실랏이 파리엔의 침대 가까이로 자리를 옮겼다. 불빛을 가린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덮였다. “내가 자네를 의심했기 때문이야. 자네를 비롯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장부를 조사했거든. 아크 함의 폭발에서 살아남은 모든 생존자들을 조사해 사보타주의 단서를 찾으려고 많은 돈을 지불했고, 결국 내가 예상했던 대로 그 단서들이 마치 등대처럼 자네를 지목했기 때문이지.” 그는 무언가를 꺼내 높이 들어올렸다. 진실과 고통을 가져다 줄 은색 데이터 패드였다. “구리스타가 네게 돈을 줬으니까, 이 버러지같은 새끼야.”
파리엔은 할 말을 잃었다. 처음에는 놀라움에, 곧이어 괴로움에 휩싸였다.
“제가…재장전 절차를 해제했어요.”
파리엔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시야에는 여전히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방은 짙은 회색 달처럼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는 통증으로 인한 경련 중에 대변을 지려버린 것 같았지만 몸이 너무 마비되어 감히 확인할 수 없었다. 부드러운 흰색 시트가 지저분하게 젖었거나, 더 심하게는 몸에서 나온 고사머 튜브가 그곳에도 설치되어 이미 문제를 처리했을 수도 있었다.
그는 고통을 막는 마법의 주문처럼 다시 말했다. “제가 재장전 절차를 해제했어요. 화기 섹션을 자주 다뤄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접근 권한만 있으면 무력화하는 데 별다른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접근 권한은 어떻게 획득했나?” 실랏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드론 관제 담당으로 재배치된 다른 승무원의 데이터키를 이용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포탄의 무결성을 확인해야 한다고 둘러댔어요.”
“그리고 비활성화는?”
“타이밍만 알면 충분히 쉽습니다.” 파리엔은 말했다. “어떤 포탄이 마지막에 나오고 어떤 포탄이 먼저 들어올지 알고 있다면 두 포탄 모두 손상시키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용한 포탄이 제대로 청소되지 않은 채 찌꺼기를 약실에 남게 하고, 처음 재장전된 포탄이 그 찌꺼기에 걸리게 하면 됩니다.” 파리엔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드론에 대해 물어보실 거라면, 그건 훨씬 더 쉽습니다.”
실랏은 한참 동안 그를 응시했다. 방 안의 기계들이 희미하지만 마치 심장이 고동치는 것처럼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침내 캡슐리어가 말했다. “잔해와 내 캡슐에 기록된 신호에서 분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지. 몇 가지 이상 징후가 있었지만, 이상 징후는 항상 있기 마련이고 수천 가지 추측만 낳곤 하거든.”
그는 은색 데이터 패드를 들고 침대 주위를 거닐었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나와 있지만, 정말로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나와 있지는 않아. 함선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엄청나게 복잡한 활동이 얽혀 있는 유기체와도 같기 때문이야. 안전장치가 있고 더 많은 안전장치가 있지만, 충분히 창의적이고 통찰력 있는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그것들이 영원히 우리를 보호할 순 없단 말이지. 그리고 바로 네놈이, 결국 수백 명을 죽이고 말았어.” 실랏은 목소리에 분노가 아닌, 마치 기대하던 제자가 또 다시 실패한 것처럼 지친 기색을 담아 말했다. “누군가 그런 일을 해낸다면, 그것은 그들이 정직하게 그 일에 착수했기 때문이야. 그들은 자신의 일이 곧 존재 이유가 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명확한 비전이 필요해. 보통은 목숨이 걸려 있는 일들이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실랏은 파리엔보다 더 많은 죽음을 겪어본 눈빛으로 파리엔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알려줬네. 이제 '왜' 그랬는지 말해보게.”
“마약.” 파리엔이 말했다. “마약에 깊이 빠져 있었어요.”
실랏은 데이터 패드를 들더니 머뭇거렸다. “이게 뭘 하게 될 지 알잖나.”
파리엔은 캡슐리어를 계속 주시했다. “마약때문이었습니다.”
실랏은 데이터 패드에 무언가를 누르는 듯한 동작을 하더니 망설이다 한숨을 내쉬며 파리엔의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자네가 마약을 했다면 내 배에 타지도 못했을 거야. 마약 여부는 승무원 채용 전 자격 심사의 일부이고, 승무원으로 근무하는 동안에도 동일한 검사를 실시하지. 어떤 캡슐리어들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난 신경 쓰며 배를 엄격하게 관리해. 만약 구리스타가 공급 라인을 유지하거나 마약 대출금을 갚기 위해 자네를 어떻게든 이용했다면, 그건 자네가 여전히 마약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내 함선에서, 내 지휘를 받는 한, 참는 법을 배우는 게 좋겠지. 마약 중독자는 소변 한 번 볼 때마다 즉시 검사하고, 분석하고, 감시팀에 보고하지 않고는 절대 소변을 볼 수 없을 테니 말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파리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겠냐고 물었다, 승무원.” 실랏이 화난 어조로 다시 물었다.
“예. 예,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약은 아무 상관없다는 거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사건 훨씬 전에 그들과 접촉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구리스타가 연루된 건 알겠네. 그건 자네의 실수였어. 이 사람들과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든 그 한 가지 메시지를 제외하고는 놀라울 정도로 비밀을 유지해왔군. 사고 후 그들에게서 받은 돈도 거의 알아채지 못했고, 자네의 재정과 관련이 있다는 흔적도 거의 없었어. 갑자기 통제권을 갖게 된 자산에 대한 이자 알림을 받기 시작했을 때 눈치챘겠지만, 아무도 어디를 살펴봐야 할지 몰랐을 테니까 말이야. 내가 이런 것을 특별히 찾지 않았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거야.”
파리엔은 눈을 깜박이지도 않은 채 실랏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누가 보냈는지 알고 있습니까? 구리스타스 조직 내 어떤 사람인지?”
“그게 마지막 수수께끼야.” 실랏이 독기를 품은 표정으로 말했다. “구리스타스 군사 부서에서 보낸 게 아니거든. 채굴 작전팀에서 나온 거지. 식민지 주민들 말이야.”
파리엔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내 정보는 여기까지다.” 실랏은 환자의 놀란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넌 지금 적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솔직히 난 당황스럽군.”
그는 다시 몸을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뇌는 자기가 곧 죽는다는 것을 아는 시점이 있다. 모든 기억이 꿈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잠재의식이 토해내는 떨리는 두려움으로 모든 기억이 물들게 되지. 이게 마지막이구나. 이번이 끝이구나. 나는 셀 수도 없을 만큼 클론 전송을 해왔지만, 무한한 허무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이라는 이 두려움은 평생 동안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거야. 그런데 자네가 와서 그걸 내게, 그리고 내 함선에 탑승했던 수백 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안겨주었어. 불꽃 한 점만 튀어도 사라질 것 같은, 먼지처럼 가벼운 네놈의 초라한 생명이 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실뭉치같은 정체는 풀리기를 거부하고 또 거부하고 있지.”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난 알아야겠어, 파리엔. 너의 충혈된 눈동자 뒤에 뭔가 숨겨져 있는 게 있는데, 그걸 보여줘야겠어. 그렇지 못하면, 너는 고통스럽게 죽을 기회조차 없을 거다.”
파리엔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옆에 있는 기계에서 뻗어 나와 침대 시트 밑으로 이어지는 튜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하얀 방과 그가 누워 있는 부드러운 하얀 베개까지 둘러보았다. 그는 경이로움에 실랏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정말 당신에겐 아무것도 아니죠? 그날 죽어간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이 말입니다. 그저 이 수수께끼 하나 때문에 나를 살려뒀군요. 이 모든 장치와 시설에 들어간 돈이면 한 가정을 1년 동안 먹여 살릴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 기회야.” 실랏이 말했다. 그는 데이터 패드를 들지 않았다.
파리엔은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첫 번째 고대 관문을 발견한 날 저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 관문 너머엔 구리스타 함대가 지키고 있던 채굴 식민지가 있었죠. 우리는 그 배들을 파괴했고, 탈출 포드에 타지 못한 선원들은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죠. 그들은 해적이었고,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식민지로 향했습니다. 사실 포탑을 무력화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겁니다. 정말 그랬죠. 그리고 단지 뒤쪽에 있는 군사 기지를 파괴하기만 하면 됐어요. 왜냐하면 그곳이 유일하게 가져갈 만한 값어치 있는 물건이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나머지 곳에는 사람들이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죠. 하지만 당신은 모든 건물을 목표로 삼고, 하이브리드건을 발사하고, 모든 사람이 있는 식민지를 폭파시켰습니다. 그들은 탈출 포드도 없었고, 아무도 당신에게 대항할 수 없었죠. 저와 함께 재장전을 담당했던, 드론 제어를 담당했던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함선의 핵심에서 그 모든 참상을 지켜보기만 했고, 신의 망치가 내려졌을 때 우리도 당신만큼이나 똑같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제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졌습니다. 제 마음 속 어떤 장벽 같은 것이요. 저는 오랫동안 승무원으로 일해왔고 이번 임무에도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그저 좋은 위치를 찾아서 적을 사살하고, 함장님의 변덕대로 남은 모든 것을 지우고 전리품을 챙겨서 빠져나왔을 뿐입니다. 캡슐리어가 지휘하는 함선이란 게 늘 그렇잖아요. 캡슐리어가 데려가는 곳으로 가면 되죠. 우리는 재장전하고 캡슐리어는 타게팅하죠. 화면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방해물일 뿐입니다.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으로 가득 찬 식민지조차도, 그들의 유일한 불행은 반대편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연으로 인해 목숨을 잃습니다. 불멸자와 그의 추종자들의 눈 아래 놓인 것만으로도 그들은 더 이상 살아갈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이 모든 삶은 죽음과 파멸에만 어울립니다.”
파리엔은 걸음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고사머 튜브가 목을 적셨다. 방 안에는 기계의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 외에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 말했다. ”…실랏, 널 죽이고 싶었어. 하지만 넌 한 사람일 뿐이고, 내가 너에게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지금 내가 힘이 있다면, 용기가 있다면, 손을 뻗어 네놈을 목 졸라버릴 텐데.
“하지만 내가 널 쫓아간다고 해도 결국 복수가 뒤따르겠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내 가족 전체와 내가 친하게 지냈던 모든 사람이, 모두 죽게 될 거야.
“게다가… 넌 나무 꼭대기에 선 미친놈일 뿐이야. 너는 장난감을 가진 아이와 같아.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인지도 모르겠어. 네 부류들은 그저 두려움의 대상이지,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야. 그건 알고 있길 바란다.
“하지만 너를 너를 도왔던 사람들, 모든 것을 굴러가게 만들어 놓고는 술을 마시며 학살을 자랑한 사람들, 이런 일로 조금도 이득을 보지 않으면서도 너의 미친 짓거리를 방조한 나와 함께 일한 승무원들, 그들이야말로 진짜 죄인이지. 그들은 죽어야 마땅했어.”
실랏은 조용히 말했다. “무장이나 그 메커니즘과 아무 관련이 없는 승무원들도 많다는 걸 알 텐데.”
파리엔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다음, 무시하듯이 계속 말했다. “그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유령이 된 것 같았어. 범죄 관련 일을 하는 이들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구리스타 중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지. 우리가 방금 파괴한 식민지를 알고 내가 보낸 어리석고 공허한 말을 전할 수 있는 사람 말이야.”
“그건 사과였어, 실랏. 내가 누구인지, 누구를 위해 일했는지 간단히 메시지를 보냈고 미안하다고 말했지. 내 금융 계좌나 배의 이동 경로 등 다른 어떤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어. 그들은 분명 나를 추적했을 것이고 그들이 지불한 돈은 그 자체로 증거지만, 그들을 위해 한 게 아니었고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았어. 결국 내가 희생자 중 한 명이어야 했지만 그저 내 포드가 고장 나지 않았을 뿐, 아크 함의 마지막 항해에서 일어난 일, 그건 그저 세상에 사죄하려는 나 자신의 노력이었던 거야.”
실랏은 앉아서 그를 쳐다보았다. “결국 자네가 포드를 파괴하고 함선을 파멸로 이끌었군.”
파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랏이 일어났다. “자네를 죽이려고 했지만 더는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야. 자네가 진정으로 속죄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 사태때 스스로가 죽도록 내버려뒀어야 했어.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군. 복수심에 불타는 신을 연기하고 싶었을 수도 있을 테고. 아니면 그저 불멸자가 된 기분이 어떤지 알고 싶었을 수도 있겠지. 난 알고 싶지 않네.”
파리엔은 베개에 등을 기대었다. “그냥 끝내버리세요.” 그가 말했다.
캡슐리어는 그를 무시했다. “자네가 구리스타를 대신해 스스로 판사, 배심원, 사형집행인이 된 이상, 자네의 사형 선고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자네의 운명에 대해 발언권을 갖는 게 옳고 당연한 일이겠지.” 그는 은색 데이터 패드를 꺼내 메시지를 입력했다. “이제 여기에서의 체류는 끝났다. 그 튜브를 제거하도록. 고통스럽겠지만 주저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예?” 파리엔이 말했다.
“자네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지만 내 승무원들은 강인한 사람들이라고 들었다. 방금 승무원 중 한 명에게 이 대화의 요지를 전달했네. 그는 임무 중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니 지금쯤 전화를 걸고 사람들을 모으고 있겠군.”
실랏은 데이터 패드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문으로 향했다. 떠나기 전에 그는 파리엔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오, 작은 파괴의 신이시여, 추종자들이 오고 있소.” 그가 말했다. “지금 당장 도망치고 싶을 거야.”